BYUNGHO LEE
Le Vide 空의 영역
2016. 11. 10 - 12. 10

갤러리 기체는 이병호 작가의 개인전 ‘Le Vide 空의 영역’전을 11월 10일부터 12월 10일까지 개최한다. 1958년 파리 한 화랑의 텅 빈 전시장에 커다란 캐비닛을 놓아두고,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고자 함으로써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브 클라인(Yves Klein)의 전시는 그의 작업 초기 핵심적인 모티브의 하나였다. 미술계에 작가의 존재를 알린 이른바 실리콘 작품들 역시 그런 연장선에서 기계 장치를 이용해 공기를 특정 형상 안에 가두고 수축과 팽창을 반복시킴으로써 공기 자체, 시간성 등을 시각화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 편으로 작가에게 기계장치 등에 의존함으로써 물리적 표피, 즉 물질을 전제하지 않고는 보여질 수 없음을 자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작가 스스로 작업의 출발점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여기서의 출발점이란 바로 보이지 않는 영역을 조각적 언어로 환기시키고자 하는 그의 작가적 화두를 일컫는다.


이번 전시 ‘Le Vide 空의 영역’에서 작가는 박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죽을 씌우기 전까지의 단계에서 이뤄지는 조형적 방식에 주목한다. 그 과정의 핵심은 복제 생산된 단일 형태를 바탕으로 무한한 가짓수의 형태들로 변형하는 것에 있다. 가죽이 없는, 겉이 사라진 대체물을 제작하려 함은, 겉모습이라는 표상의 틀을 벗어나 존재하는 비정형의 그 무엇을 조각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작가적 의도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는 마무리로 껍데기를 씌우기 직전까지의 박제더미 제작방식을 따르고 있는 이른바 완성이 결여된 ‘과정으로서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작품들이 완성이 유보된 현재진행으로 제시됨으로써 결국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 무한한 확장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으로 믿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말이 성립되지 않는 형용모순(Oxymoron)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무모해 보이는 시도들은 그야말로 실패를 위한 실패에 가깝다. 작가는 이런 자발적 좌절의 과정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형상이 없는 무형의, 고정되지 않는 진행형의 ‘조각적 포착’은 가능한가?”라는 하나의 작가적 질문을 공유하고자 한다.


이병호 작가는 홍익대학교 및 동대학원 조소과를 마쳤으며, 타이페이 크로스 갤러리, 16번지(갤러리 현대), 갤러리 잔다리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부산비엔날레를 포함해 도쿄 모리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소마미술관 등의 주요 기획전에 참여했다. 대만 아티스트 빌리지, 경기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선정된 바 있으며, 홍콩 크리스티 등에서 주목 받았다.






불가능한 존재,

텅 빔의 나타남


[이병호: Le Vide, 의 영역] 갤러리 기체 2016.11.10-12.10                                                                                                      안소연 (미술평론가)

 

공백, 그것이 환기시키는 불안은 아무 것도 없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야 할 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음으로 인한 존재에 대한 강렬한 기다림 때문일 것이다. 이미 여기 있어 왔던 공백의 실체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자는, 예컨대 (형태의 내부로서의) 그 공백이 생산해낼 수 있는 우회적인 다수의 형상들을 내심 기대하는 것이다. 이병호의 개인전 [Le Vide, 의 영역](2016)은 그렇게 붙잡을 수 없는 공백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 존재에 다가가기 위한 예술적 사유의 한 흔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지금까지 고전적인 조각의 형태를 참조해, 그 충만한 외피가 노골적으로 감추고 있는 공허한 형상들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벌거벗은 형태의 공허함

 

사실 이번 전시에서 우리가 보게 될 형상들은 너무 낯설다. 평소 이병호의 정교한 작업 방식을 지켜봐왔던 이들에게, 외피로부터 발가벗겨진 이 거친 형상들은 무엇이라 명명하기 힘들 정도다. 이 형상들은 외피의 안정적인 형태,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난 임의의 공백을 실체화한다. 돌이켜보면, 2007년 무렵부터 시작해 온 실리콘 조각에서도 형태에 대해 그가 가져왔던 동일한 사유와 그 흔적들을 대략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병호는 구체적인 대상을 지시하는 일련의 형태로서의 조각을 제작해왔다. 특히 인체에 대한 매우 사실적인 묘사는, 보는 이의 시점을 곧장 외피의 윤곽선에 고정시켜 놓을 만큼 안정적이고 충분하다. 등지고 누워 있는 여성의 신체를 좌대 위에 묘사해 놓은 <Deep Breathing>(2011), 고전적 미의 규범을 모방하듯 완벽한 윤곽선을 과시한다. 하지만 좌대와 일체인 양 꽉 차 있던 단일의 윤곽선은 어떤 동력에 의해 당장 그 존재를 위협받게 되는데, 견고한 외피를 지탱해주던 공기가 내부로부터 서서히 빠져나가자 사라진 형태들이 남겨놓은 존재의 흔적은 또 다른 형태의 윤곽을 새롭게 규정한다. 그것이 이병호가 말하는 내부영역이자 껍질 이면에 존재하는 텅 빈 영역의 실체를 지각하는 방법이다.1)

 

그는 줄곧 조각의 강한 물성이 빚어내는 물리적 형태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여 왔으나, 정작 그의 관심은 강력한 윤곽선 밑에 봉인되어 있는 비물질적인 차원의 존재를 어떻게든 사유하는 데 있었다. 이처럼 최근까지 그의 작업은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그것의 현전을 모색해 온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짐작컨대 이러한 비가시적인 사유의 과정을 환기시키기 위해 오히려 익숙한 조각적 상태의 본질에 더욱 다가가려 했을 것이다. 조각적 형태의 표면을 충분히 재현해 놓음으로써 보는 이의 시선을 무력하게 안주시키는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그 형태의 윤곽을 불확실한 공백의 차원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무력했던 시선마저 그 벌거벗은 변화의 순간을 목격하는 적극적인 사유의 과정 속으로 끌어들인다.

 

한데, 이병호는 이번 전시 [Le Vide, 의 영역]에서 그토록 비물질적 차원의 존재-다수를 실체화하기 위해 부여잡고 있었던 단일-형태의 선명한 윤곽을 지워보려 했다. 형태가 만들어 놓은 경계, 즉 윤곽으로부터 벗어난 미완의 자유로운 인체 형상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애써 모방해 왔던 몸의 표면/경계/윤곽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그 안의 불확실한 공백임을 자처한다. 이때 공의 영역이라는 그 불가능한 실체, 즉 텅 빔의 나타남을 다시 조각적 형태로 사유해 보기 위해 이병호는 박제 제작 과정을 참조했다. 동물의 몸통에서 벗겨낸 얇은 외피로 본래의 형태를 다시 모방하기 위해서는, 그 외피와 그것의 움직임을 지탱해 줄 내부 공간이라는 임의의 실체를 얻어야만 한다. 결국 이병호는 윤곽을 가진 형태의 외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간, 이를테면 벌거벗은 형태의 텅 빈 실체와 외적 윤곽으로부터 구속되지 않는 운동성을 어떻게든 상상해야만 하는 것이다.

 

| 새로운 임무를 향한 다수의 형상들

 

전시된 동명의 두 작업 <Two Figures>(2016)를 보면, 마치 미완인 듯 불확실해 보이는 두 개의 거친 인체 형상이 뭔가 확신할 수 없는 운동성을 암시하고 있다. 형태가 발현되는 것인지 사라지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이 모호한 실체는, 결과적으로 하나의 단일-형태로부터 비롯된 다수성(multiplicity)의 논리를 증명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병호는 두 점의 <Two Figures> 뿐 아니라,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Triptych>(2016)<Bust>(2016)에 이르는 총 여덟 개의 인체 형상을 단일한 원형 틀에서 복제해 각각 변형시키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복제된 단일형태의 윤곽선을 과감히 해체하고 지워나가면서, 그 형태의 고정된 외피 안에 보이지 않게 잠복해 있던 무한한 다수의 형상을 출현시킬 방법을 어떻게든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때문에 그는 무한한 다수의 형상이 차지하고 있는 형태의 텅 빈 내부 공간에 주목했다. 이는 철학자 바디우가 말한 대로 나타나지 않고 감각할 수 없는 다수들의 상징을 일컫는 공백(le vide)”이라는 차원에서 그의 철학적 사유와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병호의 작업은 견고한 조각적 형태 안에 존재하면서도 좀처럼 명명할 수 없었던 공()의 영역에 다가가, 나타나지 않고 감각할 수 없는 다수의 존재를 상상하는 것이다. 형태의 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그 형태 내부에 존재하는 공백에 대한 역설적인 실체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일이다. 마치 바디우가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의 아름다움을 사유하면서, 춤 속에 있는 고정되지 않은 것의 은유를 설명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병호는 조각적 형태 안에 고정되지 않은 것의 은유로서 공의 영역이 존재함을 강조해왔으며,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불확실한 공백의 차원을 은유하는 일련의 형상들을 탐색함으로써 그 공백을 드러내는 (불가능한) 조각적 시도를 감행했다. 하지만 바디우가 자신의 논의에서 공백은 하나의 이름일 뿐이며 공백이 그 자체로 드러나거나 무화되기를 바라는것은 불가능한 욕망이라 말했듯이, 공백에 대한 이병호의 조각적 사유는 애초에 실패를 자초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 이 다수의 형상들은 드러나기를 거부하는, 순수한 명명으로만 남게 될 공백에 적극 다가간다. 그렇기 때문에 공백과 최대한 가까워진 형상들이라 말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torso, bust, figure 등으로 이름 붙여질 수밖에 없는 이 거친 형상들은 공백 그 자체라기보다는 공백을 사유하는 하나의 은유이자, 텅 빔을 명명하는 논리의 과정 안에 존재한다. 이병호는 이를 조각이라는 특수한 사건속에서 발생시키려 한 것이며, 이같이 조각적 형태를 초월하려는 사유는 줄곧 현대조각의 핵심을 관통해 왔다. 나타나지도 감각할 수도 없는 비가시적 영역에 대한 조각적 시도는, 단일하고 투명한 시각적 총체를 추구해온 미학적 규범 대신 형태의 불투명한 내부에 서성이고 있는 유령 같은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공백 그 자체만을 보여주었던 이브 클라인(Yves Klein)의 전시 Le Vide(1958)에서 제목을 가져온 이병호의 [Le Vide, 의 영역], 형태의 윤곽을 망각하여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은 형상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벌거벗은 익명의 다수 형상들이 단일-형태의 내부, 즉 스스로의 공백에 위치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의 조각은 형태와 존재에 관한 이런 역설적 사유 안에 놓여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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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병호의 실리콘 조각 연작은 내부에 부착된 센서를 통해 형태의 움직임과 변화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 제작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조각의 외피는 흙으로 빚은 인체의 원형을 파손시키지 않도록 틀을 떠낸 뒤 실리콘으로 얇게 캐스팅하여 완성된다. 이때 남겨진 원형으로 작가는 그 표면을 조각해 들어가면서 동시에 해부학적 골격을 제작한다. 외피와 달리 내부 골격은 실리콘보다 단단한 재질의 FRP로 캐스팅 한 후, 유연한 외피를 지탱해주는 실제적인 골격의 기능을 담당한다. 최종적으로 골격과 외피 사이에 공기를 주입해 완벽한 형태를 갖추게 되지만, 센서를 통해 서서히 공기가 빠져나가면 형태의 윤곽은 차츰 변형되어 마침내 해부학적 골격 위에 포개어진다


2) 이 글의 전반적인 내용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비미학을 참고했다.